시각적으로 표현된 저항과 환각 기사

기성사회에 대한 저항에서 자기중심주의까지 베이비붐 세대의 독특한 시대정신 반영

 

베이비붐 세대의 디자인 혁명을 부추긴 요인은 베트남 전쟁과 음악·마약 말고도 많았다. 그들은 ‘리브 잇 투 비버’(Leave it to Beaver·1950년대 미국 가정의 라이프스타일을 엿보게 해주는 TV 시트콤)에 나오는 집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싸구려 라미네이트 가구, 넓은 테두리를 두른 채 벽에 걸린 볼품없는 꽃이나 새 그림의 복제품, 거칠게 보풀이 일어난 카펫. 이런 집안 환경 역시 반란을 일으킬 만한 이유가 됐다.

 

베이비붐 세대가 처음으로 자신들의 디자인 취향을 반영한 분야는 레코드판 재킷이었다. 1960년대에는 음반이 사방 30.5cm의 정방형 마분지 재킷에 담겨 나왔다. 당시 신세대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시스틴 성당의 천장에 명화를 남긴 미켈란젤로처럼 그 재킷 위에 자신의 기량을 펼쳤다. 음반은 청각 못지 않게 시각적인 체험도 제공했다. 비틀스의 ‘Sgt. Pepper’와 크림의 ‘Disraeli Gears’, 심지어 뮤지컬 영화 ‘헤어’의 사운드트랙까지 모든 음반의 재킷들이 ‘물병자리 시대’(뉴에이지)를 증언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만화 같은 혼란상을 가장 잘 포착한 작품은 재니스 조플린과 그녀의 밴드 빅 브러더 & 더 홀딩 컴퍼니의 ‘Cheap Thrills’였다.

 

그 음반의 재킷을 디자인한 사람은 당시 막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클리블랜드 출신의 축하카드 아티스트 로버트(일명 R) 크럼(1943년생)이었다(조플린은 그와 친구가 됐고, 그에게 재킷 디자인을 의뢰했다). 크럼이 음반 재킷보다 더 큰 공헌을 한 디자인 분야는 ‘코믹스’(comix)라는 언더그라운드 반체제 만화였다. 뉴욕·샌프란시스코·텍사스주 오스틴 등지에서 발간된 코믹스 잡지들은 ‘기성사회’의 냄새를 조금이라도 풍기면 무엇이든 경멸했다.

 

크럼의 냉소적인 호색한 주인공 미스터 내추럴과, 길버트 셸턴의 늘 마약에 취해 있는 패뷸러스 퍼리 프레이크 브러더스가 등장하는 ‘잽 코믹스’가 대표적이다. 코믹스 잡지들은 뒤이어 나온 무례할 정도로 신랄한 풍자 만화 작품들의 바탕이 되었다. 이 잡지들이 없었다면 게리 트뤼도(1948년생)의 시사풍자 만화 ‘둔스베리’나 오늘날의 세련된 그래픽 소설(예술성 높고 분량이 긴 만화)들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크럼의 동료들이 베이비붐 세대의 또 다른 족적을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 남겼다. 다름 아닌 록 콘서트 포스터 제작이었다. 지미 헨드릭스·올맨 브러더스·산타나 등이 충격적이고 감동적인 공연을 펼치던 빌 그레이엄의 필-모어 오디토리엄이 주요 무대였다. 예일대에서 색채학을 공부한 웨스 윌슨과 빅터 모스코소(일명 네온 로즈) 등이 제작한 포스터들은 그래픽 디자인의 기본 원칙인 ‘명확성’을 무시했다. 물담배 연기를 연상시키는 문자 도안과 과감하게 변형된 사진, 놀라운 색채 조합은 공연에서 체험하게 될 ‘최면에 가까운 상태’를 생생하게 예고해주었다. 그레이엄은 모터사이클을 타고 시내를 누비며 전신주에 포스터를 붙이기가 무섭게 광적인 수집가들이 포스터를 떼어갔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한편 뉴욕에서는 미술 근로자 연맹(AWC)이 포스터의 또 다른 방향을 모색했다. 베이비붐 세대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베트남 전쟁이 음악보다 훨씬 더 중대했기 때문이다. 1968년 베트남 미라이에서 일단의 미군 병사들이 양민을 학살한 사건에 분노를 터뜨린 포스터가 가장 유명하다. AWC는 학살 현장을 담은 소름 끼치는 사진(민간인 남자와 여자, 어린이의 시체가 진흙탕 길에 널려있다)에 크고 거친 타자기 활자체로 사건 조사 증언에서 발췌한 설명을 달았다. ‘질문: 아기들까지?’ ‘답: 아기들까지.’ 이 포스터는 당시의 디자인 같지 않은 그래픽 디자인의 가장 좋은 예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베이비붐 세대는 저항의 열정을 저버리기 시작했다. 1960년대의 향락주의자들이 가정을 이루고 교외로 이주하면서 미온적인 자기도취자로 탈바꿈했다. 그로써 ‘자기중심주의 시대’가 시작됐다. 1970년대 초 캘리포니아주 리버모어에 있는 한 작은 신문사의 사진기자 빌 오언스는 젊은 주택 소유자들과 친분을 맺고 그들의 생활을 사진에 담았다. 그들은 안전한 집과 자동차 두 대를 소유하는 중산층의 안정된 생활을 추구했다. 오언스는 그곳에서 1930년대의 농업공황(Dust Bowl) 당시 서부로 내몰린 이주 노동자들의 역사까지 들먹이며 사회 다큐 사진집을 제작할 생각은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1972년 발간된 그의 책 ‘교외거주자’(Suburbia)는 신랄한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은 과연 이런 것들이 행복을 가져다주리라고 생각할까?”

 

베이비붐 세대는 유난히 자동차를 애호했다. 당시 ‘보통(유연)’ 휘발유의 가격이 갤런당 30센트에 불과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자동차 이용이 급증하자 미국 교통부(DOT)는 주간(州間) 고속도로의 각종 시설에 사용할 획일적인 표지판 제작을 고려했다. TV 드라마 ‘케빈은 12살’에 나오는 1960~70년대 미국 가정의 모습처럼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획일성의 추구였다. 1974년 DOT는 쿡 앤 섀노스키라는 디자인 회사에 공중전화·화장실·식당 등의 시설에 사용할 알아보기 쉬운 그림문자 디자인을 의뢰했다. 이 간단하고 작은 기호들(공항의 화장실 등 표시에 여전히 사용된다)은 난해한 사이키델릭 이미지의 유행에 쐐기를 박았다. 그것은 또 베이비부머의 시대는 언어가 아니라 이미지로 대표되는 시대라는 좀 더 심오한 진실의 증명이기도 했다.

 

1980년대 들어 일부 베이비붐 세대는 레이건 시대의 금융거래와 LBO식 기업 매수(매수 예정 회사의 자본을 담보로 한 차입금으로 추진하는 기업 매수)로 큰 돈을 벌어들였다[이로써 베이비붐 세대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톰 울프로부터 ‘돈을 물쓰듯하는 세대’(the splurge generation)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그러자 그들은 다른 여러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도 탐닉의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타이포그래피(활자를 사용한 인쇄술)와 페이지 레이아웃 부문에서 다양한 스타일로 나타났다. 1985년 디자인 쿼털리에 180cm 길이의 폴드아웃(접어 끼운 페이지)을 발표한 에이프릴 그레이먼(1948년생)의 겹겹이 포개진 글자들과 난무하는 대각선들에서 서퍼 출신인 데이비드 카슨(1956년생)의 음울한 ‘그런지’ 폰트(글자 주변을 번지게 해서 피가 흐르는 듯 보이게 한 활자체)까지.

 

그러나 완전한 몰입과 풍성한 이미지라는 베이비부머 취향에 비추어 볼 때 1984년 로스앤젤레스 하계올림픽을 따를 만한 디자인이 없다. 조직위원회는 1982년 미네소타주 블루밍턴의 몰 오브 아메리카(Mall of America: 미국 최대 규모의 실내 쇼핑몰)를 설계한 건축가 존 저드에게 디자인을 의뢰했다. 저드는 운반 가능한 가벼운 모조 건축물[그는 농담으로 자기 자신을 ‘마분지 소노튜브(종이나 천을 말 때 심지로 쓰는 속이 빈 말대)의 왕’이라고 칭했다]과 펄럭이는 현수막, 알록달록한 색채를 이용했다. 저드의 신선한 디자인은 이 올림픽이 풍요를 추구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이상에 걸맞게 2억 달러의 큰 수익을 올리는 데 일조했다.


베이비붐 세대는 개개인이 부유해지면서 현대미술품 수집을 보편적 취미로 정착시킨 미국 최초의 세대가 됐다. 그들은 대학에서 미술사 강좌를 들었으며, 미술 전시회를 관람하는 인구도 기록적 수준에 이르렀다. 그들은 1970년대 말부터 자신의 취향에 맞게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부모 세대의 꽃 그림 복제품을 떼어내고, 그 대신 쉽게 구할 만한 최신 유행 작품으로 부담스럽지 않게 아이로니컬한 로이 리히텐스타인과 에드 루샤의 팝 아트 판화들을 걸었다. 좀 더 혁신적인 수집가들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여성잡지 마드모아젤의 수석 디자이너가 된 바버라 크루거(1945년생)의 작품을 선호했다.


크루거는 아이젠하워 시대의 진부한 이미지를 되풀이하고, ‘또 다른 영웅은 필요 없다’(We don’t need another hero) 등 훈계조의 문구를 사용했으며, 흑·백·적의 충격적 색채 조합으로 생생한 대형 몽타주를 제작했다. 크루거의 미술은 베이비붐 세대의 청년 시절인 1960년대 사회 격변의 잔류물을 함유했다. 풍요를 추구하는 베이비붐 세대가 완전히 자기만족에 빠져들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 격변 덕분이었다.


글: 뉴스위크


신묘년, 뜨거운 태양이 떠오르다 에세이

신묘년 새 해가 떠올랐다.

봉화산 정상 봉우대에 올라 그 떠오르는 태양을 반갑게 맞이했다.

올해는 많은 욕심을 버리고 작은 소망을 하나씩 만들어 가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해 본다.

딱 3가지 목표를 토끼해 아침을 비춘 첫 해에게 보냈다.

2011년 힘찬 전진을 기약한다.




영원한 톱스타 베리 매닐로 기사

엇갈린 평가받는 팝스타 매닐로 라스베이거스 장기 공연에 나서

Barry Hot

배리 매닐로(58)는 1972년 카네기홀 무대에 처음 섰다. 당시 막 인기를 얻기 시작했던 카바레 출신 스타 베트 미들러의 피아노 반주를 위해서였다. 집세 정도나 건지던 ‘게이 배스하우스’ 공연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무대 커튼 뒤에 서서 관객들의 환호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매닐로는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의 자택 근처 레스토랑에서 옛날을 돌이켰다. “베트와 나는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이게 뭔일이래?’하는 표정이었다. 그건 너무….” 그는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한바탕 웃었다. “잠깐. 지금 내가 인생유전이 어쩌고 하는 건가? 누가 관심이나 있겠어? 만약 누군가 진짜 관심을 보인다면 그것도 참 놀라운 일이고. 사실 내가 지금 뉴스위크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 자체도 말이 안돼. 지방 놀이공원 같은 곳에서 연주나 하는 게 마땅하다고.”

스무살이 넘은 미국인치고 배리 매닐로를 농담거리로 삼아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매닐로 자신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오페라풍의 팝 발라드, 아리송한 머리모양, 주름 소매가 달린 낙하복…. 매닐로는 70년대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의 앨범은 아직도 매년 1백50만장씩 팔려나간다. 그가 1978년에 만들었던 ‘Copacabana’의 리믹스 곡은 요즘 댄스 클럽에서 인기 1위에 오르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매닐로는 현재 라스베이거스 역사상 가장 기대되는 공연 중 하나인 ‘Music and Passion’의 개막을 기다리고 있다. 공연은 2월 23일 힐튼호텔에서 시작해 2006년까지 계속된다. 매닐로에게 고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언제나 인정과 비아냥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해 왔다. 그래서 라스베이거스 공연이 비아냥의 진흙탕에 나를 밀어버리면 어쩔까 걱정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인기가 떨어진 80년대 이후에도 그가 비상업적 재즈 앨범을 선보이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엔터테이너로서의 명성 때문이었다. 고별공연이라 알려졌던 지난해 투어 콘서트는 가는 곳마다 매진 사례였다. “나를 알아주는 또 다른 세대가 생긴 것 같다”고 매닐로는 말했다. “그게 아니면 부모에게 세뇌당해 내가 죽기 전에 한번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머, 봐. 그가 아직 살아 있네. 어서 티켓을 사자’고 말이다.”

어릴 적부터 타고난 엔터테이너였던 매닐로는 브루클린에서 러시아 이민자의 딸인 어머니와 ‘수많은’ 사촌들 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맥주트럭 운전사였는데 매닐로가 태어나고 얼마 안돼 집을 나갔다. 가족에게 음악은 아주 중요했다. 매닐로는 지금도 강하게 남아 있는 브루클린 억양으로 “시대만 잘 타고 났다면 우리 엄마는 뮤지컬의 여왕 에델 머맨처럼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줄리어드에 들어갔고 CBS 방송국 우편물 발송실에서 일을 하며 22세 때 결혼했다. 그로부터 4년 후 매닐로는 일도, 결혼생활도 그만두고 맨해튼 재즈클럽과 카바레에서 연주를 했다.

그는 CM송을 만들기 시작했고 1972년에는 레코드 계약을 했으며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걸고 연주 투어를 떠나기도 했다. “당시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CM송을 메들리로 엮었다. 사람들은 내가 뭘 하는지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닥터 페퍼·트라이던트 광고 메들리에 열광했다. 사실 예술성이라곤 없었지만 관객들은 좋아했다.”

매닐로는 1973년 재즈앨범으로 데뷔했는데 판매실적은 별로였다. 두번째 음반을 준비할 당시 아리스타 레코즈의 클라이브 데이비스 사장은 좀더 팝적인 곡을 쓰라고 종용했다. 매닐로는 반대했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매닐로에게 노래 한곡을 들고와 채근했다. ‘Mandy’는 그렇게 태어났고 순위차트 1위에 올랐다. “라디오를 켜고 팝송을 들은 건 그때가 진짜 처음이었다. ‘Boogie, Oogie, Oogie’와 ‘Kung Fu Fighting’이 나온 후 ‘Mandy’가 나왔다. 그때 ‘오, 세상에!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해!’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고 옛날을 회상했다.

매닐로가 당시 음악계를 구한 것인지 혹은 망친 것인지를 두고 아직도 논쟁이 한창이다. 본인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뭐? 그 친구가 좋다고?’라며 어이없어 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하다. 이 남자와 함께 거리를 걸어가면 모두들 그를 알아본다. 매닐로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으려 애쓴다. 탈색된 청바지와 시커먼 스웨터를 입고 호텔 로비 구석에 서 있길 좋아한다.

목소리도 조용조용하다. 하지만 자신을 웃음거리 삼아 농담을 던질 때는 굉장히 크게 웃는다. 사실 이런 웃음은 10분에 한번씩은 터져 나온다. 그는 무대 뒤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하다고 말했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멋진 가수 일을 하게 됐다. 하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음악가이자 편곡자이며, 프로듀서이자 작곡가다. 분장하고 옷을 차려 입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관객들 앞에 나서는 건 정말 너무 힘들다. 다시는 무대에 서지 않아도 됐을 때 내가 진정으로 무대를 그리워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그의 말을 믿건 안 믿건 어쨌든 공연은 그의 삶이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매닐로는 라스베이거스 쇼에서 자신의 오래된 팝 고전들을 모아 한편의 음악동화를 만들 것이다(그는 이미 ‘Copacabana’·‘Harmony’ 등 2개의 뮤지컬을 작곡한 바 있다. 극중 노래는 그의 2004년 음반 ‘Scores’에 수록돼 있다). 그러나 매닐로는 ‘Mandy’를 무언극으로 꾸미는 ‘태양의 서커스’(Cirque du Soleil) 같은 공연은 하지 않을 거라고 단언한다. “이번 공연은 이야기 중심이다.

나는 피아노 바에서 수년간 연주했다. 그래서 이번 공연 중 한곡은 피아노 바 분위기를 연출할 것이다. 그리고 관객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쩌면 나도 지금까지 이렇게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다른 피아노 바에 가셔서 항아리에 5달러를 집어넣고 배리가 감사해하더라고 말하세요’라고 말이다.” 물론 사실은 반대다. 피아노 연주자들은 자신들이 팁을 받을 수 있도록 그 모든 노래를 만들어준 매닐로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 또한 정말 매닐로다운 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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